[원아림의 ‘안 읽어도 됨’] GET YOURSELF OUT

포스트 말론이 ‘래퍼’도, ‘아티스트’도 될 수 없는 이유

비틀스의 기록 하나가 깨졌다. 에디터와 달리 인터넷상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당신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1964년 4월, 비틀스는 <빌보드> 역사상 최초로 ‘Can’t Buy Me Love’를 비롯한 다섯 곡을 ‘핫 100’ 최상위권에 올렸다. ‘톱 20’ 차트에는 총 여섯 개의 비틀스 곡이 동시에 머물렀다. 이 기록을 두고 음악평론가 강헌은 저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 1>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원히 불가능한 기록이 세워졌다.”

세계에서 출간된 수많은 언어의 인쇄물이 이와 닮은 평가와 감탄을 담고 있다. 54년,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모두 그렇게 믿었던 거다 ― 2018년 5월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영원히 불가능’해 보였던 기록을 경신한 건 미국 텍사스 출신의 22세 래퍼 포스트 말론(Post Malone)이다. 4월 말 발매한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Beerbongs & Bentleys>는 ‘빌보드 톱 200’ 1위 데뷔 후 20위 권에 9곡을, ‘톱 40’에는 14곡을 올렸다. 100위권 내에는 18곡의 앨범 전곡이 머물러 있다.

순위가 음악에 가치를 부여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한 문단을 할애해 언급한 이유는 순위라는 제도에서 얻은 성과가 그 자체로 일종의 업적 혹은 권력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숫자와 서열을 좋아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명확한 자연수로 구분된 ‘차트’는 그런 욕망의 상징이자 현상이다. 당연히, 선망의 대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역사상 전무한 ‘세기의 기록’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선사한 포스트 말론은 선망받아 마땅한가.

그는 자칭 ‘장르 없는’ 음악가로, ‘장르를 구분 짓는 건 멍청한 짓’이라 말한다. 유튜브상의 한 인터뷰 영상에서는 자신이 ‘래퍼가 아닌, 아티스트’라는 주장도 찾아볼 수 있다(언제부터 ‘래퍼’와 ‘아티스트’는 다른 것이었나). (그가 보여주는 말투나 차림새는 제쳐두더라도), 데뷔 초기부터 현재까지 말론은 랩을 하고, 21 새비지, 타이 달러 사인, 와이지 등의 래퍼들과 협업했으며, 트랩 비트를 차용해 멜로디를 입힌 곡들을 발표해왔다. 궁극적으로, 그는 랩 음악의 요소로 막대한 성공을 거뒀다. 그럼에도 굳이 힙합과 거리를 두려는 이유는 뭘까. 나아가, 그는 “요즘 힙합엔 진솔한 의미가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인생에 관한 진지한 감상에 있어선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장르일 뿐’이라고.

의문이 든다. 말론은 어디쯤 있나. 제이 콜이, 켄트릭 라마가, 조이 배드애스가, 스카이주가, 진 그래와 크웰 크리스가, 그리고 차일디시 감비노가 경찰 가혹 행위와 문화 전유, 젠트리피케이션과 트럼프 정부에 관해 말하는 동안, 어디에 머물고 있나. 그들을 비롯한 ‘요즘 래퍼’들이 장르를 매개체로 삼아 드러낸 감상보다 더 진지한, 말론의 말처럼 ‘한바탕 눈물을 쏟게 하는’ 감상은 무엇인가.

‘비어 봉’과 ‘벤틀리’, 생 로랑과 스리섬. 코데인과 보드카에 섞은 샴페인과 나체로 수영장에 뛰어드는 이국적인 소녀들. 포스트 말론은 앨범 전반에 걸쳐 그가 머물러온 세상을 이야기하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에게 힙합은 신입생 MT와 같은 거나한 파티와 고급 차, 그리고 ‘싼 티’와 ‘럭셔리’를 의도적으로 ‘믹스매치’해 드러내며 당당할 수 있는 물질적 성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빌보드 차트 경신’으로 대변되는 말론의 성공은 그런 의미에서 유감이다. 그를 비틀스도, 제이 콜도 뛰어넘게 하는 거대한 대중의 현실이 억압과 격차, 부패와 물질 만능이 지배하는 2018년 5월의 현실과 진정 분리된 것일까 봐서다.

만일 에디터가 염려하는 게 사실에 가깝다면, ‘수백만장자’가 된 말론의 성공은 당연한 것일 뿐이다. 특정 문화를 제약 없이 차용하는 동시에 그것의 태생과 역사,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책임과 자각의 기회로부터 멀리하는 말론의 안일함은 세대를 이어져 답습된 불공정에 길든 우리 입맛에 꼭 맞는 것일지 모른다.

그의 욕망이 향하는 곳마다 길이 있었다. 짐을 풀 새도 없이 신대륙에 깃을 꽂고 반 발짝을 디딘다. 누군가 존엄성을 지키려 일궈낸 안전함과 창의성과 가능성의 지대는 그에게 화려함과 자극으로 가득한 땅이다. 부와 성공, 그 뒤에 남은 욕망은 태연한 멜랑콜리와 반골적인 페르소나다. 순응적인 ‘자본가’ 따위로 머무는 건 너무 무난한 일 아닌가. 창의적 ‘에지(Edgy)’가 필요하다.

성취를 향한 여정은 길지 않다. 물적·인적 자원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게 세상의 핵심이니까. 모든 상상을 끌어내어 어울릴 만한 차림새와 버릇과 몸짓을 부여했다. 언젠가 ‘내 것이었으면’ 하며 동경했던 특별한 고통(들)도 함께. 비로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을 만큼 만족스럽다.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성공을 거듭하다 보니 성가신 사람들이 많아진다. 지난일을 들먹이며 뭔가에 빚진 듯한 태도를 강요하는 사람들. 모두 ‘헤이터(Hater)’일 뿐이다. 안 보면 된다. 결국 ‘평등’이 옳은 쪽 아닌가. ‘세상의 흠은 뒤로하고,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그런 거. 역차별은 곤란하다. 게다가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누명은, 너무 억울하다.

‘디스’가 너무 길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하지만, 한 인물을 부정적으로 거론하는 데에 이렇게 지면을 할애했어도 에디터는 여전히 ‘헤이터’가 아니다(말론이 언급한 의미는 그를 ‘백인이라 미워’하는, 혹은 유명해서 질투하는 경우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특성이나 현상을 이유로 던지는 신상 비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에디터는 그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호소를 안일함에 대한 변명으로 삼는 경향이 악하다고 여기는 쪽에 가깝다. 또한 단순히, 존중을 결여한 채로 마이너리티 문화를 선별적으로 차용하는 행위는 ‘나쁘’다. 차용한 대상이 자신의 상태와 반대로 유동성을 빼앗긴 이들에게서 태어난 것이라면 더욱. 그에겐 너무 오래되고 당연해서, 인지하는 편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 이해한다. 게다가, 현실과 분리된 온전한 상상의 세상이 선사하는 (‘헤이터’ 강박증을 초래하기 충분할 정도의)안락함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래도 그만, 나오시라. 힙합이 진솔한 의미를 상실한, 힙합을 통해선 우리 삶에 중대한 논의를 기대할 수 없는, ‘래퍼’는 ‘아티스트’와 상반된, 상상 속의 고통을 대입해 연기하는, 이상한 그곳. 오스틴 리처드 포스트가 영원히 ‘래퍼’도, ‘아티스트’도 될 수 없는 그곳에서.

그렇게, 용기와 지혜를 내는 순간부터 그는 조금씩 힙합을 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때까지, ‘포스티(Posty)’의 웅얼대는 보컬과 오토튠(Auto-tuned) 알앤비, 수학으로 치면 1차 방정식에 비유하기도 아까운 코러스 멜로디의 유치한 조합은, 미안하지만 그 어떤 차트를 들이민다해도 좋아해줄 수가 없다.


에디터 원아림(@ahrimwon)

10 Comments

Sorry, the comment form is closed at this time.